여기서의 '포르노그래피'는 포르노 영화를 뜻하는 게 아니다.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제 우연히 유튜브에서 사춘기 시절 학생들을 표현한 영화 일부분을 봤다.
카메라는 뻗치고 서서 때리는 학생과 맞는 학생을 한 프레임에 담았다.
때리는 학생은 정말 때렸고, 맞는 학생은 정말 맞았다.
그 몇 분동안 컷은 바뀌지 않았다.
정말 리얼했다.
왜냐하면 정말 때리고 정말 맞았으니까.
연출 의도야 뻔하다.
실제 같았으면, 했던 거겠지.
그러나 그 감독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관객은 '실제 같았으면'하고 바라지만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자각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
'저거 실제잖아'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영화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포르노그래피다.
폭행 장면은 실제여서 잔혹하게 다가옴과 동시에 맞은 학생은 정말 괜찮을까? 트라우마가 되진 않았을까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생동감 있게 진짜 맞는 것처럼 꾸밀 수 있다.
그래서 영화다.
때리는 시작점을 찍고
막상 맞는 곳은 보호장치 해서 클로즈업으로 처리하고
맞는 감정은 표정으로 묘사해도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을 것이다.
무슨 개 똥고집으로 그렇게 실제로 때려야만 했을까?
주구장창 때리던데, 심해도 너무 심했다.
아무리 배우가 괜찮습니다, 하고 말해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실제처럼 보이고 싶은 욕심이었다면 당신은 앞으로 다큐만 찍으면 된다.
배우에 대한 예의도 동료의식도 없으니 참 한심하다.
영화속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예는 많다.
서구의 거장은 실제로 강간을 하게 해 리얼한 필름은 얻었으나 여배우는 트라우마를 앓았고 수십년이 지난 작년에 털어놓았다.
좀 더 과격한 예를 들어보자.
살인장면이라면 어떨까?
좀 더 실감나게 죽여봐.
좀 더 실감나게 죽어봐.
그런다고 실제로 죽일 것인가?
실제로 죽인다면 그건 영화가 아니라 다큐나 전쟁필름이나 CCTV의 화면일 뿐이다.
영화는 더 실제처럼 보이는 더 진짜 같은 은유의 예술이다.
관객은 실제보다 더 실제 같길 원하지 영화 속에서 실제를 보는 것은 원치 않는다.
불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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